태영호 의원. 국민의 힘. 서울 강남구 갑
태영호 의원. 국민의 힘. 서울 강남구 갑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다가오는 25일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3주년을 맞아 "6.25 전쟁에 대해 재평가 및 재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22일 밝혔다. 

태 의원은 "6.25 전쟁에 대한 일반적 평가에서 낙동강 전선에서의 결사 항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서부터 전쟁 판세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많은 경우 개전 첫 한 주일이 국군의 무질서한 퇴각과 혼란, 무저항 등 악몽과 같은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조기 탈출과 한강대교 폭파가 가장 큰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면 개전 첫 한 주일 동안을 북한군의 기습공격, 속전속결 작전의 성공작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태 의원은 "6.25 전쟁 첫 한 주일 평가에서 북한과 한국의 평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일치되는 점이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조기 탈출과 한강대교 폭파가 제일 많은 혹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에서 결사 항전을 벌이자는 국군 장성들의 요구를 꺾고 자기만 살려고 미국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서울을 탈출했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팩트는 열차로 떠났다) 영화도 만들었다. 김일성이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조기 포기를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김일성이 소련군사고문단과 함께 만든 작전계획에 의하면 개전 한 주일 내에 국군 주력을 서울에서 ‘포위섬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승만 대통령과 국군이 서울에서 결사 항전을 벌일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태 의원은 "김일성은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북한군 2사단은 서울로 오지 말고 수원을 먼저 점령하라고 했다. 국군이 서울을 수호하기 위해 총집결하면 그때 서울서북부와 수원으로부터 국군을 포위하여 국군을 서울에서 전멸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6.25가 발발한 당일 밤에 대전을 임시수도로 정함으로써 개전 첫날 서울수호를 포기할 줄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 개전 첫날 서울수호는 결국 김일성의 작전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것을 내다 보았다는 것은 정말 선견지명이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개전 첫날 탱크를 마주한 국군은 극도의 공포 속에 혼비백산했던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만약 서울수호를 외쳤으면 우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국군은 궤멸되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을 임시수도로 선포하였기 때문에 일선 지휘관들도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하여 병력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물론 혼란 속에서 상당한 군 장비를 서울에 남겨둔 것이라든지, 한강대교 폭파 시점을 서둘러 정한 것 등 실책은 군 지휘관들이 져야 할 책임이다. 그리고 우리는 춘천에서 결사 항전하여 개전 첫 5일 동안 북한군의 수원지역 장악을 막은 국군 6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공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 의원은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에 입성했으나 김일성은 전쟁이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국군주력이 서울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스텝이 꼬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일성은 당시 서울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북한군 전선 사령관 최용건에게 즉시 한강을 건너 한국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했으나 최용건은 북한군 2사단이 춘천을 돌파해 곧 수원을 차지할 것이라며 본래의 작전계획을 고집했다. 화가 난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의 직권으로 최용건을 전선사령관에서 해임하고 김책을 임명했으며 춘천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던 북한군 야전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북한군 지휘부에서의 작전상 다툼으로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을 지체했고 그동안 우리 군은 3일이라는 황금의 시간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6월 29일 한강 방어선에서 있었던 맥아더 장군과 고 신동수 일등병과의 유명한 대화도 국군 6사단이 북한군의 수원비행장 점령을 막아 맥아더 장군이 수원비행장에 착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상의하여 주도면밀하게 6.25 전쟁을 준비했다는 것은 6.25 전쟁 하루 전인 6월 24일에 무장 수송선을 이미 출발시켜 부산을 점령함으로써 혹시라도 발생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참전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김일성은 6월 25일 밤 부산항에 육전대 600여 명을 상륙시켜 교두보를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당일 밤 우리 백두산함에 의해 북한 무장 수송선은 격침됐다. 당시 텅 비어있던 부산시에 북한 특수부대 600명이 상륙하였더라면 부산은 전쟁 첫날에 벌써 북한군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된다"고 설명했다.

태 의원은 "이렇게 우리는 6.25 전쟁 개전 첫 주 동안 김일성과 스탈린의 속전속결 전략을 수포로 만들었으며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개전 첫 한 주일 우리 국민과 국군은 미군이 참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오직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의지 하나만 가지고 결사전을 벌였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6.25 전쟁 첫 며칠 동안처럼 군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싸워야 한다. 그러자면 6.25 전쟁 개전 첫날부터 우리 힘으로 싸웠던 역사에 대한 재평가, 재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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