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무용가에서 ‘춤추는 독도’ 창작
한류 전파 위한 ‘K-드럼’ 만들고 싶어
형식에 구애없는 ‘다장르’ ‘네오클라식’ 추구

서미희 감독. 그는 무용가, 안무가, 예술감독, 기획자로서 "누구나 행복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서미희 감독. 그는 무용가, 안무가, 예술감독, 기획자로서 "누구나 행복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창업일보 = 윤삼근 기자]

“퀸(Queen)의 ‘I want break free’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고 싶습니다.”

‘춤꾼’ 서미희 감독의 일성(一聲)이다. 

그의 춤사위는 틀과 장르에 구애되지 않는다. 저고리 고름자락에 조용필의 ‘생명’이 나부끼고 ‘새타령’에 비올라가 올라 타기도 한다. 이를 그는 예술영역적으로 ‘실용무용’이라고 정의한다. 형식에 저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춤을 통해 모두가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도 복잡한 듯 하지만 명료하다. “세계인이 이해하고 감동하는 음악과 춤으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코로나펜데믹으로 모두가 힘들잖아요. 물론 춤을 통해 나도 행복하고 싶구요.” “…그리고 모두에게 행복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겸비한 행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26살에 미국 워싱턴 D.C에 유학을 가서인지 그는 문화인식은 매우 깨어있다. “한국문화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지금 저도 미국에서 잘해왔던 ‘다장르’라는 네오클라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팝에서부터 클래식, 트롯음악에 모든 장르의 춤을 연출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무용콩쿨에서 특상을 수상한 계기로 이듬해 세종대 무용과에 입학하여 한국전통무용과 발레, 현대무용을 섭렵했다. 졸업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서미희 무용단과 댄스원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미국 정부기관에서 공연을 했고 대학진학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주권선언’에 감명받아 독도를 주제로 무용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 결정체가 바로 무용극 ‘춤추는 독도’이다. 워싱턴 한인행사에 공연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독도평화대상’을 수상했다. 

춤꾼이면서 동시에 예술기획, 감독, 안무가 등 무엇이든 거침없이 가능한 서미희 감독. 재미무용가로서의 다양하고 화려한 활동, 그리고 독도사랑에 대한 일념으로 이룬 ‘춤추는 독도’ 등 다이나믹하고 화려한 그의 ‘人生 이야기’를 들어본다.

Q.현재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요? 한국 무용이라고 말씀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좀 자세히 메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무용 공연과, 안무를 기획하고, 직접무용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 무용뿐 만이 아니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춤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고 춤을 춰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습니다. 옷장 열어서 엄마의 옷을 걸치고 거울을 보며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를 유명 작곡가에게 보내서 자랑도 하고 연습도 시켰는데,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학창시절에는 학예회, 소풍, 수학여행 등 특별한 날에는 가무에 능했던 저의 진가가 발휘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한국전통 춤을 추며 민요를 불렀으며, 중고등학교 때는 한국전통 무용을 계속하면서 가요와 팝을 즐겼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주 인상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와이 공연을 TV로 시청한 것입니다. 1973년 초 MBC-TV에서 중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래와 춤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얼굴, 그 몸매, 그 가창력, ‘춤 같지 않은 진짜 춤’에 홀딱 반했습니다. 저의 미래의 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중고등학교 때는 정통 트롯보다 패티 김처럼 팝과 팝트 롯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 판소리를 하고, 나중에 팝과 팝트롯을 하셨잖아요. 저도 패티김 만큼은 아니지만 춤과 노래는 정말 잘했습니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미희야, 너는 미국에 가지 말고 국내에서 연예생활을 했으면 크게 출세했을 애야”라고 말을 듣습니다.   

저는 1976년 세종대학교 주최 무용 콩쿨에서 특상을 수상했고, 1977년에는 같은 대학의 무용특기생으로 입학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 전통무용, 발레, 현대무용을 전공했습니다. 특히 이때 무형문화재 한영숙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사사했습니다. 무용 이론은 왠지 끌리지 않았고, 무용 실기는 남들보다 열정적으로 익혔습니다. 

무용 전공이외에 부산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대학 1학년 때인 1977년 8월 사망)가 그랬듯이 ‘춤 같지 않은 진짜 춤’을 즐겼습니다.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고고춤 등 실용 무용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키는 크지 않지만, 가무에 능하고 얼굴과 몸매가 빠지지 않아서 어디를 가나 속된 말로 ‘킹카’였습니다. 

1981년 세종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후, 1983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유학을 갔다가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서미희 무용단과 댄스원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미국 정부기관과 학교 등에서 무용 공연을 하고, 미국 대학에 진학하는 교포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 강좌를 개설해서 가르치는 일도 병행했습니다. 이렇게 25년을 살았습니다.

2006년은 제 무용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해입니다. 저를 그렇게 만든 분은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그해 4월 25일 노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통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권선언’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25년 동안 한국 전통 무용을 가르치고 공연을 해 왔던 저는 그 감동적인 연설을 접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과연 내가 여태껏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리고 독도를 주제로 무용극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춤꾼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전통무용, 발레, 현대무용이라는 틀을 벗어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모든 장르 ‘실용 무용’ 공연을 기획하고, 안무를 짜는데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춤추는 독도’라는 무용극을 완성했습니다. 2010년 워싱턴 한인행사에서 ‘춤추는 독도’를 처음으로 공연했으며, 그해 말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춤추는 독도”로 독도평화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독도평화대상을 세종대학교의 호사카 유지 교수의 추천으로 수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춤추는 독도’ 무용극을 울릉도와 독도, 서울시와 각 지자체에서 수시로 공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초⋅중⋅고등학교에서 독도 역사를 학생들에게 이론과 춤으로 체험하는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춤추는 독도’는 독도의 역사를 세계의 음악과 세계의 춤이 만나도록 연출한 세계최초의 대중극(大衆劇)이며, 비단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기획된 공연입니다. 또한 프로그램이 고정되지 않고 수시로 바뀝니다. 이는 가무를 인생의 즐거움으로 살아온 저만의 독특한 문화상품이라고 자부합니다. 30∼50명이 출연하며 공연 시간은 2시간 내외입니다.

Q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전 세계적 재앙인 코로나 얘기 좀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금년 초만 해도 저는 큰 재앙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끔찍한 재앙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저로서는 제2의 고향이요 제 자식들이 사는 미국을 보십시오. 이제 인류 최악의 전염병 천연두가 되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우리 선조들이 천연두를 ‘손님’으로 불렀던 것을! 그리고‘손님굿’이라는 가무가 천연두를 손님으로 보고 잘 대접해야지 잘못 대접하는 화를 입는 것을 생각했던 것으로 압니다. 곰보가 되고 심지어는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하여튼 우리 선조들은 정말 인간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날이 갈수록 코로나가 번져가는 데, 우리는 트로트에 열광해서 삽니다. 스트레스를 트로트로 푼다고 하는 분들도 많던데 저도 공감합니다. 아무튼 가무의 민족답게 우리가 전염병을 손님굿과 트로트로 위로받는 민족인 것이 제게는 너무 흥미롭습니다.

요즈음 춤이 삶의 전부인 제가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인물은 저의 우상인 엘비스 프레슬리입니다. 1935년생인 엘리스는 1956년 혜성처럼 나타나서 전 세계를 뒤집어놓은 예술가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국에 태권도를 수련했고, 미국의 이강희 사범님으로부터 태권도 7단 단증을 받았습니다. 엘비스의 보디가드들도 모두 태권도 사범이나 고단자들입니다. 또한 엘비스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효자였다는 것이 제게는 너무 감동적입니다.

저는 21세기 최근 한국문화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지금  저도 제가 미국에서 잘해왔던  다장르라는 모든 형식 네오 클라식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팝부터 클라식, 트롯 음악에 모든 장르의 춤을 연출하여 예를 들면 : 전설적인 미국음악 Take Five음악에 박병천선생님의 전통 창작북을 공연했고 비올라 편곡에 조선시대 명창 이동백선생님의 일제시대 오래된 레코드에 음악에 맞춰 모든 새의 동작을 담은 “잡가새타령”판소리에 새 춤을 추었고(미국 워싱톤 디시 케네디센터에서 건국60주년행사) 또 조용필 노래 '생명' 음악에 독도의 태동을 안무하여 춤을 춘 (서울공연 작품 “춤추는 독도” 정기공연)등 많은 작품 처럼  공연 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다음 공연계획에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사랑하고 효와 태권도를 알린 전설적인예술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신나는 노래에 태권도와 춤의 안무로 재해석한 발전된 작품도 연출하고 싶고  코로나 시대 위안 받고 싶은 분에게 늘 새로운 주제로  진정한  다 장르 형식 공연을 기획하여 제가 공연 시 늘 사용 하는 가수 Queen의 음악 “ I want break free”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며 저도 행복하며 세계인이 이해하고 감동하는 음악과 춤으로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Q 해외 특히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다는데 혹시 기억할만한 재미난 에피소드 있으면 들려줄 수 있는지요?

▶첫째, 미국 대통령 행사에 초청을 받아서 공연한 경험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 당선축하공연을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미 동부에서 활동하는 무용인들 20여명이 축하 공연을 했으며,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2003년 공화당 전당대회에 초청되어 오프닝에서 한국 창작 북춤 공연을 했습니다.  

둘째, 2003년 미국 워싱턴에서 문화 올림픽을 표방하여 World Culture Open(WCO)가 축제가 열렸습니다.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서 문화 예술을 통해 열린 교류의 장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된 행사입니다. 세계 각국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이틀 동안 개최되었는데, 제가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 사범님과 초청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프닝에서 16명의 무용단을 이끌고 한국 창작 북춤을 선보였고, 본 행사에서는 한국대표로 동양의 정신을 소개하는 ‘Awaken’이라는 창작 춤으로 갈채를 받았습니다.

셋째, 2007년 12월 20일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님이 너무 아쉬워서 ‘니가 날 떠나’(작곡: 윤일상, 노래: 김범수)라는 곡에 맞게 안무를 짜서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2008년 8월 16일 워싱턴DC의 아름다운 포토맥 강변의 케네디센터에서 “서미희의 춤을 세계”를 연출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계기로 한미 우호를 다짐하며, 23명의 예술인들이 2시간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춤을 선보였습니다. 

넷째, 2003년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씨받이”를 오페라로 제작했는데,  제가 한국 춤을 담당해서 안무를 짜서 메릴랜드대학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습니다. 예술적으로는 제게 가장 힘들었지만 인상에 남는 행사의 하나입니다. 예컨대 신혼부부 방의 숨소리를 4개의 북으로 연출해 냈거든요! 생전 처음 오페라와 콜라보라 매우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Q 한국 무용을 하시면서 가장 후회했던 때는 언제인지요? 그리고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일까요? 그리고 왜 그랬는지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무용을 하면서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보람된 일은 교민이라면 거의 다 그렇듯이 민간사절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미 우호를 위해서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연방과 지방 정부에서 매년 Heritage Month 다민족축제가 개최되는데, 태권도와 무용이 초대를 받아 공연했습니다. 

그리고 꼭 언급하고 싶은 것 하나는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미국의 교민들도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엄청납니다. 특히 자녀들의 대학입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시생들을 위해 “댄스 원 아카데미 칼리지”를 설립했습니다. 

미국 동부(워싱턴DC, 뉴욕,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무용 교육과 훈련을 시켜서 의회를 비롯해서, 국무부, 농림부, FDA, 교통부, 보건복지부, 상공부, 세계은행 등 미국 연방과 지방 정부와 각 대학축제에서 초청을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가 “댄스 원 아카데미 칼리지”의 여학생에게는 부채춤, 남학생에게는 창작 북춤을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미국 의회 및 정부기관에서의 공연을 주선하고, 매 공연 때마다 “Appreciation Letter”(감사 서한) 1장씩을 받도록 해줍니다. 그러면 저의 “댄스 원 아카데미 칼리지”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적게는 3장, 많게는 10장의 “감사 서한”을 받게 되는데, 이는 미국 대학 입시에서 대단한 스펙이 됩니다.

이런 스펙을 쌓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 이외에 교민 자녀들은 문턱이 높은 미국 연방정부기관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좋은 경험과 또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학교측은 시간이 없는 입시생이 공부도 하고 문화를 알리는 노력을 한 것을 크게 존중해서 특별활동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의 “댄스 원 아카데미 칼리지”에 다녔던 학생들 중에는 예일대학 교수도 있고, 존스 홉킨스 연구원으로 일하는 등 미국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댄스 원 아카데미 칼리지”는 이런 공연 행사를 150여 차례나 실시했으며, 그때의 업적과 기록들이 제게 남아있습니다. 이는 제 인생의 큰 보람입니다. 이런 활동으로 저는 “한국을 알린 워싱턴DC의 100인”속에 선정될 수 있었습니다. 

Q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속하고 싶으신가요.

제가 잘하고, 미국에서부터 해왔던 오픈 다장르를 한국에서  펼쳐보고싶어요. 어느 주제든 세계평화를 위한 이벤트도 좋습니다.  "춤추는 독도"는 매년 계속 공연을 이어서 해야 하고요. 한국문화를 사랑한 효자 세계적인 예술가 엘비스프레슬리의 음악으로 춤을 재조명하고도 싶습니다. 

또한 서울서 작업을 하다 잠시 중단하고있는 K-Drum도 발전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모두를 응축시켜 나만의 창의적인 다음 작품이 나와야겠지요. 욕심이 있다면  '실용무용'이란 단어의 예술 과목을, 제경험으로 만든 수업체계로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후학도 하고싶습니다.

무용가에서 안무가, 예술감독, 기획자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런 위치로 가게 되네요. 어떤 한 분야에 계속 몸담고 있다 보면 연륜과 경력이 붙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지잖아요. 그런 결과가 ‘춤추는 독도’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역사와 평화뿐만 아니라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겸비한 행사를 만들어가고 싶고요.

Q 무용을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싶은 당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 “도전하라, 새롭게! 멈추지 말고, 뭔가를 하라! 미치도록 열정을 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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