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홍규 교수의 중국이야기

단동은 세계 각국의 첩보원들이 몰려 있다는 곳으로 단동 철교를 조망 할 수 있는 자리는 가히 A급 자리라 할 수 있다. 

단동(Dandong, 丹東, 丹东)은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이 지방에 진장바오[鎭江堡]라는 요새를 세웠는데 현재 도시의 북동쪽 약 4㎞ 지점에 있다. 이 요새는 명 후기와 청(淸:1644~1911/12) 초기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단둥 주변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나, 1862~74년에 식민을 위해 개방한 이후, 산둥 성으로부터 주민을 옮겨오게 해 급속히 개발·확대되었으며, 1876년에 정규 행정체제를 갖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시기에도 안둥(安東)으로 불리던 곳으로 1965년 개명하였으며, 북한의 국경지역에 접한 랴오닝 성의 여러 현을 모두 포함하며  압록강 어귀에서 상류 쪽 약 35㎞ 지점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고 철교로 연결 되어있다.  1907년 개항이 되었고, 3년 후 일본의 대륙진출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연평균온도 8.5℃, 연강우량 670~1,200mm이다. 항구는 흘수선(吃水線:배의 물에 잠기는 부분과 잠기지 않는 부분을 가르는 선)이 3m인 배까지 입항이 가능하며, 1933년 산업개발의 중심지로 계획되어, 거대한 섬유공장들이 세워지고 제재소와 목재 펄프 공장들이 건설되었다. 1949년 이래 산업 성장을 계속하여 산업이 아주 다양해졌다. 섬유산업은 이제 면직물·합성섬유 제조 및 제사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거대한 제지와 목재 펄프 공장이 있고, 다양한 화학공장들이 약제와 공업용 화학약품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무 공장도 있어 다양한 공산물을 가공처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등 참조)

 압록강을 사이로 중국 단동과  마주보고 있는 신의주는 옛 부터 큰 도시로 평안북도의 도청 소재지이다. 당연히 중국의 단동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왕래하며, 곳곳에서 북한 사람을 볼 수 있다. 필자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면 호텔에서 숙박 후 조식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 먼저 식사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에게 합석을 양해 받고 식사를 하다 보니 어린 아기가 부모에게 평양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반가움에 “안녕? 아저씨 서울에서 왔어.”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 어린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마치 필자가 어릴 때 북한사람을 빨갱이라고 배웠고, 간첩이 잡혔는데 신체 어디도 빨갛지 않아 의아하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동에도 동북3성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한식당들이 즐비하다.

단동에도 동북3성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한식당들이 즐비한데 이제 유엔의 제재에 동참한 중국의 결정으로 철수를 앞두고 있어 앞으로 어떠한 형태로 돈을 벌려고 할지 궁금하다. 이미 폐업한 북한식당의 여종업원들은 식당을 안 하기에 다른 허접한 노동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고, 북한의 미술가들도 몇 개월씩 단동에 와서 골방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북한의 컴퓨터 전문가들도 단동에 많이 진출하고 있고, 요즘은 애니메이션 사업도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돈벌이를 추진하려고 한다.  

단동과 신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어 거리가 먼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실제 상류로 올라가면 어른이 점프하면 건널 수 있는 거리로, 필자가 10 여 년 전 처음 갈 때만 하여도 북-중간에 철조망도 없었고, 특별한 경비 병력도 없었기에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여 재미로 좁은 상류 물길을 점프하여 북한 땅과 중국 땅을 넘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압록강이 얼었을 때는 양국의 공동지역으로 강을 건너가도 북쪽의 땅만 안 밟으면 되는 지역으로 당연히 북쪽사람들과 서로 얼굴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거리지만 그 당시에도 북한사람들은 일부러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단동 시내를 다니다보면 조선족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 늘어선 뒷골목을 마주치기도 하는데 낡은 한글간판들에 친근감이 들기도 하고 우리의 입에 딱 맞는 한식밥상을 만나기도 하니 명실공이 한중 접경지역임을 입맛으로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심심치 않게 북한 미술 작가들의 전시 작품도 볼 수 있고, 상설 전시장도 여러 곳이 있다. 사회주의 예술이 그렇듯이 북한 작가의 작품들은 탄탄한 기초위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품전에 전시된 그림들은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복사본을 만들까 염려가 되어 그런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의 황학동 같은 단동의 골동품 상점들에 가보면 북한 그림들을 백위안(우리돈 1만7천원 정도) 정도면 구입 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 미대 재학생들을 시켜 북한 작가의 그림을 모방한 짝퉁 그림으로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모르고 싼 맛에 구입들을 한다.

우리의 파주를 지나 북으로 가는 기차 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쓰여 있듯이 이 곳 단동에도 기존의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 외에 신중조우의교라는 명칭의 상당히 멋진 다리가 완공은 되어 있지만 북한쪽 공사가 완공되지 않아 실제 통행은 하지 않고 있다. 이 신중조우의교(북한 쪽에서는 '조중친선다리')는 모양도 상당히 세련되게 잘 만들어져 있다.  

압록강 철교는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둥[丹東]을 잇는 다리로서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1911년과 1943년 2개가 가설되었는데 하류 쪽에 먼저 가설된 다리는 6·25전쟁 때 미군이 파괴되어 중국에 연결된 절반만 남아 있고, 상류 쪽의 다리는 1990년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 개칭되어 완공하였다.. 그 이외에도 단동의 위쪽 관전에도 입록강 철교가 있는데 이 역시 6·25전쟁 때 군사물자와 병력을 옮기는 주요 다리이기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채 아직 것 방치되어 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毛澤東 | Mao Zedong)은 공산당을 창당하였고 지금도 인민폐에 사진이 올려있는 등 중국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관전에 가면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Máo Ànyīng)의 동상이 있다. 그는 마오쩌둥과 두 번째 부인 양카이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로 1950년 11월 25일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사하였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담배를 물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했다고 전한다. 마오안잉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중국군 지휘부에 배치되었는데, 선물로 들어온 달걀을 공습경보에도 대피하지 않고 몰래 요리해 먹다가 미군의 폭격에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단동은 세계 각국의 첩보원들이 몰려 있다는 곳으로 단동 철교를 조망 할 수 있는 자리는 가히 A급 자리라 할 수가 있는데, 북한이 워낙 폐쇄의 사회이다 보니 북-중 철교를 지나는 화물차를 보며 무역량 등을 가늠하기도 하고 특이사항이 없나를 살펴보기도 한다.

다음은 중국 산동의 아름다운 도시 웨이하이(Weihai, 威海)애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차홍규. 중국 칭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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