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홍규 교수의 ‘중국이야기’

중국 선양의 북한식당들.
중국 선양의 북한식당과 시장.

선양(Shenyang : 沈阳, 瀋陽)은 둥베이(東北)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큰 공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10세기까지는 요나라의 중요한 국경마을이었으나, 17세기 초 만주족이 수도로 삼고 성경으로 개명했다. 선양은 만주족이 중국 전역을 정복할 때 훌륭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청나라가 1644년 명을 몰아내고, 만주족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도는 베이징[北京]으로 옮겨졌지만, 선양 베이링[北陵]에 있는 청조 초기 황제들의 무덤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적지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뒤 꾸준히 번성하면서 특히 중국인(한족)들이 만주로 홍수처럼 몰려들었던 19세기 후반에 더욱 성장하였다.

청나라 말기인 1895년 이후는 변화가 심하였는데, 처음엔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의 요새가 되었다가 1905년 러일전쟁패배 후 일본이 선양을 차지하였고, 1920년대 초 일본의 보호를 받던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베이징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군벌들과 각축을 벌이며, 국민당 군과 끝까지 맞섰지만 퇴각하던 도중 사살되었다. 

2차대전 말기인 1945년 8월초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성경(선양)을 공격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했고, 그 몇 달 뒤 1946년 3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성경을 점령했다. 뒤이어 국공내전(1946~49)이 일어났고, 1948년 10월 30일 성경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뒤 공산군이 중국 본토 전체를 정복할 때 중요한 핵심지역이었다. 1950년 이후 선양이란 이름을 되찾았으며, 그 후 줄곧 중국에서 가장 큰 동북지방 종합중공업단지의 중심지로 주생산품은 군수용 산업과 각종 공업제품과 여러 소비재 등 다양하다.

중국 선양의 평양식당
중국 선양의 평양식당

우리와 인연이 깊은 것은 일본 제국시대에도 우리의 많은 동포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봉천(Fengtian/奉天 : 심양의 옛 이름)의 서탑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 뿌리 깊은 아픈 역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서탑(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 허핑구[和平區] 서탑가(西塔街)의 옌서우사[延壽寺]에 있는 탑.) 부근에는 조선족 백화점을 비롯하여 많은 우리의 동포들이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있고, 우리의 롯데리아(乐天:중국이름/Letian)등도 진출하여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서탑 지역 반경 3km 이내에 평양관, 평양 향육관, 평양무지개식당, 모란관, 평양식당, 묘향산, 평심각, 능라도식당, 평양 동명관을 비롯하여 10여개가 넘는 북한식당들이 밀집하여 북한의 젊은 여성들이 외화를 벌기 위하여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서빙을 하는데, 필자가 딸 같은 그네들의 손을 만져보니 온갖 잡일로 손이 트고 거칠어져 있었다. 

그네들이 딱하여 중국에 온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자(주 : 3~4년 전 일로 최근의 북한식당 철수와는 관계없던 시기) 오히려 운이 좋아서 중국에 왔다며 중국에 취업 나온 것을 행운이라고까지 말하여 필자를 의아하게 하였다. 부모님 직업을 물어보니 아버님은 김책공대 교수고 어머님은 당 간부라 하여 많이 놀랐었다. 우리의 대학교수 딸이 타국에까지 가서 돈을 벌려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손이 트도록 잡일을 하며 서빙을 한다면 어느 부모가 좋아하고 당사자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필자는 정치적으로 보수도 진보도 아니지만 북한의 위정자들도 그들 말대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면 하는 소망이다.

북한출신의 악극단

사드문제로 인한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는 해빙기로 접어드는 것 같다.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중미술협회도 중국의 시정부에서 초청과 중국의 여러 미술단체들이 초대 전시를 요청하였으나 불편한 관계로 계속 미루어지는 마당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한중간 외교관계가 그동안 불편하였으나 하루속히 종지부를 찍기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일을 거울로 삼아 세계의 외교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야 할 전기로 삼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예전의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의석을 가지고 여당인 한나라당과 야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헤게머니(hegemony)를 쥐고 거대한 두 당을 상대로 자민련의 위상을 높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관철하였다. 이는 현재 G2 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국이란 나라는 2012년 일본이 센카쿠 열도 국유화를 선언하자 무자비한 무역 보복을 자행하였고, 2014년 베트남이 파라셀 제도 인근에 중국이 임의로 설치한 시추장비에 항의시위를 하자 무역 보복을 하였고, 2008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달라이라마를 초대하자 무역 보복을 하였고, 2010년 노벨상 위원회가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자 바로 스웨덴에 보복조치에 들어간 전례 등 무수히 많다.

중국의 심양에 대하여 글을 쓰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갔지만 중국의 무역 보복은 언제라도 또다시 우리의 심장을 겨눌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거대기업 롯데마트가 운영하던 매장을 중국전역에서 철수하기로 함은 물론 심양에서 건설하던 아파트와 상가 등이 중국인들에게 많은 기대를 모으며 자랑스럽게 건설되다가 불상사를 맞이하였다. 심양을 바라보며 각국의 각축장이 되다가 이제는 롯데가 허무하게 철수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국력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역전쟁에 직면하고 있는 지구의 현실에서 우리의 젊은이들도 장차 ‘대한민국 호’의 선장이라는 마음으로 보다 넓게, 보다 크게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다음호는 북한의 신의주와 맞닿은 ‘단동’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한다. 

차홍규 중국 칭화대 전 교수
차홍규 전 중국 칭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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