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조우(韓中遭遇)와 그 episode에 관해서....
한중조우(韓中遭遇)와 그 episode에 관해서....
  • 차홍규 교수
  • 승인 2019.06.13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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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홍규 교수의 중국이야기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인 대낮에 수도 서울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실제상황입니다. 주민들은 비행기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당시 서울 시민이었던 필자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사건은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과,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中国民用航空总局)소속 여객기 한 대가 선양 동탑공항(瀋陽, 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치아오 국제공항(上海, 虹桥国际机场)으로 가던 중에 일어난 것으로, 당시 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승무원이 완강히 거부하자, 총격까지 가하며 2명의 승무원에게 중상을 입히고 기수를 우리 대한민국으로 돌렸다. 이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건국 후 처음 대한민국에 착륙한 일로 온 국민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비행기는 수도 서울을 피하여 춘천에 소재한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 기지에 불시착하였다. 그들은 중화민국(현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여, 그 당시 박세직 안기부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하고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납치범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박희태 관리국장(후에 국회의장 역임)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일부 신문에서는 ‘봉황이 날아 들어왔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는 등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초기 당황한 중국정부는 당일 오후 5시경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식국호를 사용한 전문을 김철용 교통부 항공국장 앞으로 보냈는데 전문은 'Kim, Chol-Yong, Director General, Civil Aviation Bureau, Ministry of Transportation, Republic of Korea'로 된 문서이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 정부는 북한을 의식하여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을 원했으나,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쥔 우리 정부의 고자세에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우리의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후에 외교통산부 장관 역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측과 직접 협상을 벌여야 했다. 

후일담으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교섭의 핵심은 납치범의 처리와 서명당사국의 명칭이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납치범들을 범죄인들로 간주하고 인도를 요구하며, 양국의 국가 명칭도 사용치 않으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우리 요구가 대부분 관철된 9개 항에 걸친 정식 외교 각서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며 합의에 서명을 하였다. 또한 항공기는 안전점검 후에 돌려보내고, 승무원 및 탑승객들은 부상자 치료 후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나, 납치범은 우리 뜻대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당시 최고급인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삼성전자 등 관광을 시켜주었고, 5월10일 중국으로 돌아갈 때는 당시 한국에서도 귀했던 컬러TV, 전자시계 등 많은 선물들을 잔뜩 안겨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중국으로 돌아간 다음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고 떠들기 시작하였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공산당 간부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시 소련은 철의 장막, 중공은 죽의 장막이라고 하여 자유세계와의 교류가 단절되어 인민들은 물론 중공의 당 간부들 조차도 우리가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로 알고 있었다. 

당황한 중국정부는 귀국한 자국민들을 분리 심문하였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똑같이 한국에는 고층빌딩도 많고 자동차도 많고 공장에서는 전자제품도 많이 만들고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산당 간부들은 공산주의에 회의를 갖게 되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해 6월 13일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승진하였고 이 사건은 그의 개혁개방정책에 날개를 달아주게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사건 이후 양국의 교역은 1년 만에 4배, 6년 후에 120배 늘어났고 86 아시안 게임에 아시아의 공산국가론 유일하게 중공이 참가하였다.

한편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형식적인 구속 수감 후(중화민국은 이들을 자유 투사, 반공 의사로 간주하고, 즉각 대만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무역 보복까지 하려 하였고, 실제 한국인을 상대로 한 테러 등도 일어남)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台湾)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였으나, 납치범 중 일부는 망명이후 중화민국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값을 목적으로 아동을 유괴했다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 중국항공기 사건이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중국정부는 한-중 수교를 예견하고 민항기 사건 이후 57개 소수민족 중 조선족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였다. 실제 심양 거주 조선족들은 밀가루대신 쌀을 배급 받았고, 조선족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도 건립되었다. 또한 수교 전 인데도 이듬해부터 스포츠 교류 및 조선족의 한국 방문 허용하였는데, 친인척 방문 허용을 기회로 하여 중국의 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소속은 물론 조선족 공무원들을 부부동반으로 동원하여 한국의 각지에 보냈다. 

이들은 임의로 한국의 식당이나 공장 등에 취직하며 처해진 상황에 따라 얻은 정보를 중국정부에 보고하도록 지시받았다. 즉 한국에서 버는 돈으로 생활도 하고 저축도 하고 정보도 얻었고, 귀국 후에는 정보의 가치에 따라 밀렸던 봉급은 물론 보다 나은 신분적 대우와 포상금을 따로 받았다. (위 사항은 우리 신문지상에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필자가 많은 조선족 공무원들에게 확인한 사항이다.)

우리나라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수교한지가 올해로 27년째이다. 처음 중국과 수교할 때만 하여도 중국이 이렇게까지 발전 할 줄은 중국 현지에 있던 필자는 물론, 중국인들도 상상조차 못하였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백화점이란 곳도 화장실에 대변보는 곳의 칸막이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한 중국이 이제는 미국과 더불어 G2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더욱 무역규모가 미국을 앞질러 우리나라의 세계최대 교역국이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최근 춘천시는 급증하는 중국 등 국내외 관광객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위 사건의 민항기를 구입하여 관광자원으로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는데, 비하인드 스토리로 당시 납치된 비행기 안에는 중국미사일 핵심 기술자가 탐승하였기에 중국 측이 협상을 서둘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실제 일부 탑승객들은 신분증을 알아 볼 수 없게 조각내 버리는 등 신분을 감추려고 조직적인 은폐 행동을 하였음을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알 수 있다. 

차홍규. 전 중국 칭화대 교수. 한중미술협회회장.
차홍규. 북경 칭화대 전 교수. 한중미술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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