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손에 재벌 총수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  한 주주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모습이 담긴 주주총회 책자를 넘기고 발언하고 있다.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 한 주주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모습이 담긴 주주총회 책자를 넘기고 발언하고 있다.

[창업일보 = 노대웅 기자] 주주 손에 재벌총수가 물러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27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이 불발됐다. 이날 서울 방화동 본사에서 개최한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73.8%의 출석률을 기록했으며 출석 주식의 64.1%가 조 회장의 재선임 안에 찬성했고 35.9%가 반대했다.  

이에 따라 조 회장은 지난 1999년 4월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가 된 지 20년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대한항공 정관상 사내이사 선임은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을 퇴진 시킨 주역은 최근 국내서 싹을 틔운 '주주 행동주의'이다. 주주 행동주의란 주주가 투자 수익을 높이기 위해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뜻한다. 시세 차익·배당에만 관심을 갖고 단기 보유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 감시 활동을 펼쳐 적극적으로 주주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 업계에서는 이들의 주권이 탄력을 더 받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동안 재벌 총수의 강력한 지배력으로 소액주주의 권리는 무시돼왔다. 이사 선임을 포함한 안건은 표결 대상이 아닌 확정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그 그 단초는 토종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다. 총수 일가의 전횡으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됐던 한진그룹을 타겟으로 작년 11월 한진칼의 2대 주주로 등극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진칼은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지주사다.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22일 KCGI가 주주제안 자격이 없다고 판결함에 따라 오는 29일 한진칼 주총에 안건조차 올리지 못하게 됐지만 한진가와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재벌 총수의 전횡 문제를 부각시키고 소액 주주의 권리를 높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KCGI에 맞서기 위해 한진그룹은 배당 확대 등을 담은 자체 혁신안 '한진그룹 비전 2030'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한진그룹 외에도 현대홈쇼핑, 아스트, 한솔홀딩스, 무학, 강남제비스코, 태양, KISCO홀딩스 등도 국내외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에 맞닥뜨리며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을 고민을 해야 했다. 

아울러 상장사들이 지난해 결산에 대해 30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배당을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주주 행동주의 움직임이 배경이 됐다는 전언이다. 

'종이호랑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온 국민연금이 작년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가의 의결권 지침)를 도입한 것도 주주 행동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실제 조 회장이 사내이사로 재선임되지 못한 것은 2대 주주 국민연금을 포함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 "이번 주총은 조양호 회장이 기업가치를 훼손하고 주주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반대의견에 손을 들어준 것"며 "KCGI 등 견제 세력에 힘이 실리면서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송민경 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방관자 역할에 머물렀던 개인 주주들이 국민연금, 언론 등을 통해 의견을 반영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대표 연임안 부결이라는 결과가 나온 보인다"며 "몰론 오는 29일 한진칼 주총에 KCGI가 주주제안을 올리지 못하게 되면서 진정한 주주행동까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소액 주주의 권리와 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라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주주 행동주의가 기업의 성장을 압박하고 장기적인 기업 가치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입장문 통해 "조 회장이 대한항공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을 국민연금이 고려하지 않은 결정으로 판단된다"며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하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에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의 부당한 요구에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와 외국인 투자가들은 현 경영진의 손을 들어줬다"며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가 무조건 경영에 반대하거나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2019년 주주총회를 계기로 올 한해가 '주주 행동주의'의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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