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일보】하도겸 칼럼니스트 = 차를 마신다. 가끔 사람들과 만난다. 차도 마시고 사람들도 만난다. 차를 마시면서 사람들과 같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말을 섞는다. 이게 맞는 표현인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차를 마시는가? 차를 마시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가? 가끔 헷갈린다. 차가 애인이고 도반이고 스승인데, 차를 마시면서 굳이 따로 사람을 만날 필요가 있는가? 아니 차 외에 다른 이를 버젓이 만나도 되는 건가? 외로울 때 내 옆에 있어 준 차에 대한 예의가 맞는가? 거꾸로 사람을 만나면서 다른 차를 마셔도 되는 건가? 가끔 심하게 혼동이 된다.

 


*보이차

 

곁에 있는 사람과 시답지 않은 말과 익숙치 않은 농담으로 소중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는 사람보다는 차에 집중한다. 앞에 사람을 두고 차와 은밀하게 귓속말하는 듯해서 조금은 미안하다. 아니 조금은 통쾌하다. 거꾸로 도반들과 진지한 말을 나누며 마시는 차는 잠시 집중력을 흐리게 한다. 성실하지 못한 나를 보게 된다. 도반의 얘기에 동조해서 한참 취해 있다가 목이 말라 마시는 한 모금의 따스한 차는 정말 아찔할 정도다. 건널목을 지나가는데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상형)을 보고 친구와 얘기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형국이다.

 

무의식적으로 쳐다본 게 더 나쁜가? 아니 무의식적으로 차를 마신 게 아니라 차가 나를 불러서 마신 건 아닐까? 머리와 가슴이 도반의 이야기에 취해 있을 때 차는 어쩌면 이 냉엄한 현실과 직면한다. 내 가슴과 머리가 그의 부름에 응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차는 내 가슴이나 머리가 아니라 내 목과 손에 에둘러 응답을 요구한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 차를 바라는 내 목젖과 찻잔으로 향해 가는 손은 이미 그 사실을 다 안다. 다만 내 가슴과 머리는 애써 모른 척하는 듯하다. 도반의 이야기에 집착하는지 집중하는지 아예 모르기도 하다. 그것을 단순히 무의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마음은 알았으니 무의식은 아닌 듯하다. 다만, 몰랐던 것으로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 혹시 무의식은 아닐까?

 

도반의 말들을 본다. 그가 일희일비한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다고 징징댄다. 생각대로 안 된다고 칭얼거린다. 속세에 쌓은 공덕도 없으면서 무슨 욕심은 그리 많은지. 오늘은 또 죽고 싶다는 말까지도 한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럼 나가 죽어라!’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잠긴다. 참는 게 억압이다. 화를 안 내는 더 큰 강요다. 목에서 머리와 가슴이 전쟁한다. 불통이다. 소통을 위해서 ‘뚫림’과 ‘풀림’의 황차가 필요하다. 마음은 소통을 원하기에, 차 공부를 한 머리라면 ‘우이암차’ 등의 황차를 찾는다. 그렇지 않다면 알 수 없는 갈증에 아무런 차나 입에 부어 넣게 된다. 무명이 고통의 원인이 맞다. 모르는 게 병통이 되기도 한다. 혹시 잘못해서 ‘백차’를 마시면 치명적으로 우울하게 된다. 움츠림의 성향이 있는 백차는 눈 빨간 토끼가 엉덩이가 빨간 원숭이를 싫어하듯 원진살일 뿐이다.

 

황차는 사람의 목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한방에 확 뚫어준다. 풀어준다. 머리와 배 사이의 모든 막힘을 뚫어주고 원활하게 해준다. 먹다가 목에 걸린 가시를 빼주듯이 황차는 위의 운동을 촉진해 소화를 돕는다. 얹힌 것이 풀리니 당연히 긴장도 풀어지게 된다.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황차는 그렇게 내 몸과 마음속에 막힌 곳을 뚫어주고 풀어주며 우리의 몸에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자기 목숨을 내 고통과 바꿔간다. 그런 친구가 황차다. 그러기에 불편한 마음이 있어 심포가 막혀 답답해 응어리를 뚫고 싶으면 침을 맞든가 황차를 마시면 된다. 이 경우 자라남의 녹차, 올림의 홍차, 내림의 흑차(보이차 포함)를 마시면 안 된다. 그렇게 차도 역시 그 종류에 따라 오행으로 나뉘고 그 다른 움직임을 드러낸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볍게 애피타이저로 황차를 고른다. 황차 한 잔으로 마음을 풀고 머리 가득 복잡한 마음을 내리기 위해 보이차를 우린다. 차는 소중한 내 친구다. 내 도반이다. 애인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소중히 대할 수 없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를 더 소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차이기 때문이다. 물아일체라고 지금까지 떠들었으면서 알 수 없는 변명으로 차를 뒷방 신세로 만든다. 그리고는 난 ‘일기일회’의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손님으로 맞이한다. 평생 한 번 다시 못 만날 인연인양 상대를 대접하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난 아껴둔 차까지 미안한 감조차 없이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는 깊어간다. 맑고 밝고 편안하고 아름답고 향기롭고 의로운 그런 사귐에 차는 함께 한다. 고마운 차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몸에는 오래된 숙변처럼 알 수 없는 화학적인 가스가 가득하다. 독이다. 해독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해독은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조금씩 천천히 자주 중화를 시켜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차’다. 그리고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이 30년이 지난 ‘노차’다. 차다운 색과 향과 맛과 기운을 간직한 노차는 가격까지 귀하다. 그런 귀한 친구를 비장해 뒀다가 도반이 찾아오면 내놓는다. 남편이나 아내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지만 차는 아낌없이 나눈다. 아무런 계산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 환희심으로 내놓는다. 그게 보시의 진정한 의미일까?

 

난 요즘 매일 돈세탁을 한다. 간혹 강사료도 출연료도 원고료도 들어오려는 기미가 있으면, 전화해서 날 거치지 않게 NGO 나마스떼코리아에 바로 기부하게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부금들로 NGO는 한 해의 예산을 짠다. 그 예산으로 직원들 월급도 나간다. 지금까진 나를 비롯해 누가 누가 기부해서 만들어진 돈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그 이름표를 건 게 바로 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난 요즘 그 이름표를 떼어내는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돈세탁이란 게 좀처럼 쉽지 않다. 아무 계산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부하는 맑고 밝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순수한 노동으로 얻어진 재물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런 ‘노차’와 같은 사람 말이다.

 

어느새 내 곁에 오래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던 노차는 나를 닮은 듯하다. 아니 내가 노차를 닮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공간에 참 오래 같이 있었다. 내 방의 환경을 공유하며 아니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한 노차는 스스로 더 좋은 차가 되기 위해 발효하며 재홍배를 거친다. 나도 지지 않을세라 고치고 또 바꾼다. 일신우일신한다. 그렇게 귀한 오랜 친구이지만, 차는 매개체로 보조제일 뿐이기도 하다. 난 과감하게 노차를 도반에게 턱 내놓으며 한껏 깡을 부리기도 한다. 가장 맛있는 차는 양을 많이 넣은 노차라고 한다. 가격이 얼마를 하든 그런 계산 없이 많은 보이차를 차호에 넣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은 그만큼 넉넉해진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런 식으로 오늘도 호연지기를 키웠다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도반에게 내놓은 노차는 전혀 아깝지 않다. 도반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다. 아니 그런 구분도 필요 없다. 무의미하다. 오로지 내 생활이 맑고 밝아졌다면 충분하다. 다른 건 다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차를 마셔도 내가 맑고 밝아지지 않으면 ‘허당’이다. 내가 먼저 맑고 밝아져야 한다. 내가 어두운데 좋은 차를 마신다고 맑고 밝아지진 않는다. 그런 차는 없다. 오직 내가 먼저 고치고 변해야 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건강해야 한다. 차만 마실 게 아니라 모든 음식도 그렇게 차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식치(食治)고 삶이고 사귐이다. 그것이 차와 음식이라는 물(物)의 격(格)을 잡는 일이기도 하다. 차를 우려서 도반과의 사귐을 맑고 밝게 하며 자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격물의 시작인가 보다.

 

* 이 글은 차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필자를 비롯한 일부 전문가들의 이해나 주장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습니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도 반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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