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독일에 구걸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독일에 구걸하지 않았다”
  • 편집부
  • 승인 2014.12.0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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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일보】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와 주목을 끈다. 그동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일방문에 대해 국가원수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눈물의 구걸외교였다는 평이 많았었다. 그러나 최근 한 국회의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온당한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당시 독일 정부에서도 ‘아시아의 비스마르크’라는 말을 쓸 정도로 대대적인 환영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창업일보 편집부

 

<> 지난 여름 한·독 교류사업을 추진하던 황인자 새누리당 의원이 반세기 전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 국빈방문 자료를 살폈다. 뜻밖의 사실이 확인됐다. 1964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원조 획득을 위한 여행’ ‘눈물의 여행’ 국가로 독일을 찾았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증거들이 드러난 것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박정희 부부와 에르하르트(1897~1977) 총리 부부.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황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국빈방문이 5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잊혀가고, 공식자료가 아닌 일부인사들의 진술이 국내언론을 통해서 주로 소개되다보니 훨씬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가려져있는 것 같아 보였다”고 전했다.

“우리정부 자료와 떠도는 풍문 사이의 차이를 밝혀줄 객관적이고도 귀중한 사료인 1964년 12월 4일부터 16일까지의 독일신문 원본 50종을 입수”한 황 의원은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국빈방문과 관련해서 그간 알려진 것과는 너무도 다른 역사적인 사실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게 9가지다.

우선, 독일신문들은 방독 이틀 전부터 방독기간 내내 박정희를 ‘아시아의 프로이센인(人)’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철학적이면서도 강철처럼 굳은 독일인의 국민성을 사랑하는 박정희를 독일통일과 독일제국 건설의 주역인 비스마르크에 비유했다.

 


*박정희와 빌리 브란트(1913~1992) 베를린 시장.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독일신문들은 또 박정희가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 나오는 ‘라인강의 기적과 불사조의 독일민족’이라는 글에 주목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이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특기하면서, 미국 일변도를 지양하고 유럽과 경제관계를 확대하기 위한 슬기로운 외교행보가 바로 박정희의 독일방문 목적이고 지적했다. 미국의 자업자득이라고 봤다.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감축이 한국정부로 하여금 ‘오직 미국과의 관계’가 아니라 ‘또한 미국과의 관계’로 정책을 전환하도록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황 의원은 “독일신문들에는 단 1건도 박정희 대통령이나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기사가 없었다. 모두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기사들 일색이었다. 수집한 50종의 신문은 수없이 많은 독일 신문 중에서 무작위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논조는 당시 모든 독일신문의 일관된 입장으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더구나 신문들이 5·16을 혁명(revolution)으로 일관되게 표기한 것도 눈길을 끈다”고 짚었다.

 


*육영수(1925~1974) 인터뷰 기사. 1964년 12월13일 벨트 암 존타크

 

박정희의 독일방문이 우리정부의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통일정책 구상의 시발점’이라고도 평가했다. 실제로 한·독 양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체제가 보장되는 평화통일’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는 박정희의 연설과 한·독 공동성명에 명기돼 있다. “이 원칙에 따라 독일은 박정희 대통령 방독 25년 후에 통일을 실현했으나, 우리는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의미 부여는 계속된다. “독일 국빈방문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던 독일사랑이 결실을 맺은 여행, 독일의 발전상을 벤치마킹하기 위한 철저한 학습여행이었다. 즉, 광복 이후 20년 간 몇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애국적인 방문이었다.”

국내에는 ‘독일정부가 박정희를 푸대접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황 의원은 “정반대로 독일정부와 국민은 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예우와 대접을 했다”며 “박 대통령이 독일의 쾰른 본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에르하르트 총리, 뤼브케 대통령, 게르스텐마이어 하원의장을 비롯한 거의 모든 각료들이 나와 환영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사례의 하나다. 이는 모든 독일신문의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바로잡았다.

 


*한국 전면특집. 1964년 12월10일 라인 차이퉁

 

주권재민 의식에 바탕을 둔 거국적 정상외교였다는 판단이다. 야당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3명이 공식수행원에 포함됐다는 것, 귀국 보름 후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이라는 순방자료집이 발간됐다는 것이 근거다.

“무엇보다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 등 책자에 ‘방독소감’을 남겼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가원수와 영부인이 해외순방 후 방문소감을 남긴 것은 1964년 독일방문이 유일하다.”

육영수에게도 주목한다. “내조가 빛난 정상외교였다. 독일신문은 육 여사의 사회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대해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내조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육영수 여사가 직접 기획한 책 ‘여류한국’을 교민과 독일인들에게 증정하는 등 선물을 각별히 준비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황 의원은 “독일신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빈방문을 통해 국제 외교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고 평가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박정희(1917~1979)를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와 비교, ‘아시아의 프로이센인’이라고 보도했다. 1964년 12월5일 하노버셰 알게마이네

 

황 의원은 8일부터 10일까지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새로 쓴 한독관계 반세기’전을 개최한다. 박정희의 독일 국빈방문 50주년을 계기로 현지에서 구입한 신문과 사진들을 선보인다. 원본 신문 50종, 사진 100여점, 관련서적 등이며 영상도 보여준다.

주독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도 지낸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1964년 독일신문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방독소감보다 더 가슴 찡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나도 미처 몰랐던 역사적인 사실들”이라고 털어놓았다. 신동립 뉴시스 온라인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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