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은 쉽지않아....스타트업에겐 성공한 CEO가 좋은 교과서

김규학 광흥건설(주) 대표. 직원 2명으로 시작해 연매출 300억원을 올리는 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남의 성공이 쉽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안된다고 역설한다. 스타트업에게 성공한 CEO만큼 좋은 교과서도 없다. 제주 더퍼스트70 호텔에서 가진 그와의 인터뷰는 여러모로 인상깊다. (C)창업일보.

(창업일보)윤삼근 기자 = “남이 성공하니 그냥 쉽게 된 것 같아 보이지요?”

지금도 귓속을 멤도는 말이다. 그날 새벽 기자는 제주 서귀포 한 호텔 옥상에서 간밤에 일어난 사건사고와 당일 송고할 기사를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새섬과 올레시장, 그리고 이중섭 거리를 지척에 두고 있는 그 호텔의 진짜 매력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바다 뷰(view)였다. 소혀처럼 붉게 타오르는 일출은 덤이다.

붉은 빛줄기가 남쪽바다를 서서히 물들였다. 기자는 노트북을 열었고 부산에 사업본거지를 둔 광흥건설 김규학 대표가 하늘공원(옥상을 그는 그렇게 불렀다)을 찾은 것도, 하필이면 그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이뤄진 인터뷰였다. 

그렇게 시작된 김 대표와의 즉석 인터뷰는 기자에게 충분히 유의미했다.

직원 2명으로 시작하여 현재 30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건실한 건설회사로 키워냈다는 그의 성공스토리는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을 주로 취재하는 기자로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취재감이었다. 스타트업에게 성공한 롤모델을 익히는 것만큼 좋은 교과서는 없기 때문이다. 

광흥건설이 시공한 부산항 방파제 보강공사 현장. 사진 광흥건설 제공(이하 동일)

모든 성공한 CEO들이 그렇듯이 김대표 역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7년 다니던 쌍용건설에 사직서를 내고 사업을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마흔을 문턱에 두고 다시 건설회사를 창업 했으나 역시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그럭저럭 10년이 흘렀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사장, 건설업에 몇 년간 종사했소?”

하도 힘들어 사업을 접고 다른 일을 할 작정으로 평소 존경하던 멘토를 찾아가 들은 말이었다. 김 대표는 그때의 충격을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고 술회했다. 

그날 이후 김대표는 재장전에 들어가 현재 광흥건설은 주택과 오피스텔 등 주거시설 및 상가건물, 병원을 짓는 종합 건설회사로, 그리고 도로 항만 철도를 아우르는 토목회사를 넘어 최근에는 호텔 사업까지 아우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베트남 토목공사 현장.

사표를 던지는 날

하지만 처음 김 대표가 회사에 사표를 던지는 날, 아무리 생각해도 봉급쟁이로서는 앞길이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든지 사업을 하기로 작정하고 직장생활 7년 만에 쌍용건설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때가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때 마침 해외근무를 갓 마치고 귀국한 뒤, 부산 용호동 항만공사현장에 근무 중이었다. 사직을 결심하자 하루가 급했다. 이유인즉, 퇴직 직전 3개월 급여를 평균한 급여가 퇴직금 정산 시 반영되기에, 한 푼이라도 더 퇴직금을 받으려면 신속하게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사직서를 수리했다는 말도 없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직서를 던졌으면 응당 사직서 수리 통보가 와야 퇴사처리가 되는 것이기에 한 달 이상을 더 출근하다가 현장소장에게 재촉했다. 

“왜 사직 처리 안 해주세요? 후임도 보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자넨 본사에 계신 전무님께서 붙잡고 있으니, 전무님께 가서 따져보게”

당시 회사에는 그를 동문 직계 후배라고 보살펴주셨던 분이 계셨다. 63학번의 주재원 전무님으로, 쌍용건설의 전 직원들이 그 분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의 전설과 같은 분이셨다. 그 분께서 그의 사직서를 붙잡고 처리해주지 않으니 그에게 직접 만나 해결하라는 것이다. 

광흥건설이 시공한 주거 및 오피스텔.

다음날 본사로 상경하여 만나 뵈었다. 대뜸 그에게 물었다. 

"와 그만 둘라는데? 니는 회사에서 꽤 인정받고 있고 나도 잘 돌봐 줄라고 하는데" 
수 십 년을 서울에 살아도 경상도사람들의 발음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봉급쟁이생활 계속해봐야 별 수 없을 것 같아 빨리 그만두고 사업할라고 합니다."

갑자기 벼락같은 고함이 그의 귀를 때렸다.

"머라고! 이노무 자슥 봐라! 평생을 봉급쟁이 생활하고 있는 내 앞에서 뭐라꼬? 봉급쟁이 생활이 별 수 없을 것 같아 때려치우고 사업한다고! 그 기 내 앞에서 할 수있는 말이라고 하나"

돈을 벌려면 마땅히 사업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한 말인데........ 아차! 표현을 잘 못했구나 싶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고양이 앞의 생쥐마냥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부답으로 앉아있었다.

"내가 니를 얼마나 챙겨줬는데......."부터 시작한 말이 한 동안 속사포 같이 쏟아졌다. 그러기를 한 30분 하고나니 전무님의 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 서울 올라와 동문의 울타리 하나 없이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 설움이 오죽이나 많것냐? 그래서 내가 후배들 오면 잘 챙겨줄라고 했는데 이 노무 자슥들이 쪼매 키아노몬 도망가고, 도망가고........."

점점 한탄조로 바뀌시더니 마침내 마무리 말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 니가 잘 될려고 그만 둔다는데 내가 우째 막겠노. 그래! 가서 잘하거라. 
그래도 후임 올 때까지 현장 지켜줘서 고맙다. 내 곧 후임 보내 주께" 

항만소방서 건설.

짧은 방황 끝에 

돈 벌려면 사업해야 한다고 단단한 각오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6개월을 허둥지둥 방황하다보니‘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집구석에 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방황할 여력이 없었다. 독립의 어려움만 절실히 깨달은 채 또다시  부산에서 봉급쟁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이 사십의 문턱에서 또다시 결심했다. 지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 자식들이 커가는 부담 때문에라도 새로운 모험을 도저히 감행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그는 서른아홉 되던 해에 집사람의  불안해하는 눈치를 애써 무시하며 직장을 걷어치웠다.

산업시설 시공.

일감 확보의 어려움

‘남이 성공하니 그냥 쉽게 된 것 같이 보이지요?’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리 되지 않았다. 막상 회사를 열었지만 그에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년 넘게 일감 하나 확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친구, 친인척, 동기, 동문의 사무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일 년 만에야 일거리를 겨우 하나 얻었다.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데 얼마나 손이 떨렸던지.........

그렇지만 어렵사리 얻은 일도 수지타산이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몸소 잡역 일까지 마다 않았지만 일을 끝내고 나면 영락없이 적자였다. 모처럼 주변의 도움으로 소개를 받은 일도 계약서를 앞에 두고 건축주는 마음이 바뀌는 게 아닌가.

"회사가 너무 적어서 불안하다, 이런 규모의 일을 해본 경험이 없기에 못미덥다"

그로서는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그를 더욱 좌절하게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가 잘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가깝게 여기고 은근히‘믿는 구석’같이 여겼던 친인척, 동문들, 친구마저도 그런 눈치를 보일 때는 참으로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얻어걸린 일들이란 게 채산성이 아주 낮은 것들이거나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뿐이었다.

메디칼 시설

‘건설업 몇 년 했소?’

그럭저럭 십 년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남는 건 빚뿐이요, 커 가는 건 자식들 밖에 없었다. 

어느 해 연말, 직원 격려 차 송년 회식을 할 때였다. 달랑 3명이 앉아 건배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새삼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사업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량이 부족하다는 자괴심이 들 뿐이었다. 또 다시 고민 고민 끝에 결심했다. 십 년 가까이 꾸려오던 건설업을 때려치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평소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선배,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분으로 그에게는 대단한 멘토 같은 분이었다. 그 분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회장님,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건설업을 하려면 최소한의 요건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말하자면, 밑천이 두둑하든가,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든가, 처가가 잘 살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손바닥 비비는 재주(아부)라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무리 살펴봐도 어느 한 구석도 갖춘 게 없습니다. 제가 건설업을 한다는 게 정말이지 주제 넘는 얘기 같습니다. 이제라도 방향을 바꿔 식구들하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만한 일을 찾는 게 좋겠습니다. 이 참에 회장님께서 하나 추천해주시면 그리할까 합니다"고 아뢰었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약간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문을 여시는 게 아닌가. 

"김 사장! 건설업에 몇 년간 종사했소?"

"사업이라고 시작한지는 십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까지 포함하여 얘기하면 한 이십 년 가량 되었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소. 김 사장이 이십 년 가까이 해온 일도 잘 못하면서 다른 일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소? 다시 생각해 보소. 김 사장만큼 건설업을 하기에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이 부산에 몇 명이나 될 것 같소! 부산에서 그만한 고등학교, 대학교에 기술사 자격까지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소? 남이 성공하니 그냥 쉽게 된 것 같이 보이지요?  이십 년 동안 하던 일도 잘하지 못하면서 딴 일은 무슨 말이오? 지금 생전 낯선 일을 시작한다고 얼마나 잘 할 수 있을 것 같소?"

조곤조곤 하는 말인데도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치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근린시설.

재기의 발판

그는 집에 와 거실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밤 새 생각에 잠겼다. 집사람은 험악한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침실에서 쥐 죽은 듯이 있었고 얘들은 그냥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동틀 무렵에야 결론에 도달했다.
이 지경이 된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란 것을. 여기서 탈출하려면 철저하게 그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뭔가 조금씩 보이는 듯 했다.

그때로부터 다시 십 년이 흘러갔다. 

단 두 명의 직원은 어느새 25명으로 불어났다. 채 30억도 안되던 연 매출은 300억을 상회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제야 겨우 조금 체계를 갖춰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또 다른 10년 후의 그를 그려보며 되뇐다. 

"길은 찾아서 가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간다."
"해 보기나 했어!" - 정주영회장의 어록 中 -
"처자식 빼고 모두 바꾸어라"- 이건희 회장의 어록 中 -
"10년 후의 나는 어떻게 나타나 보일까?"

 현장사무실에 들렀더니 현장소장의 뒷자리에 표어가 하나 붙어있다.

 "길은 찾아서 가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간다!"
 
그가 하도 지껄이다 보니 임직원들도 어느새 세뇌가 된 모양이다.

그는 다시 생각해 봐도 등골이 서늘한 말, 그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어했다. 

“김 사장! 건설업 그 동안 몇 년이나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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