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이라는 이성’과 ‘미술이라는 감성’을 잇는 예술계 융복합 문화사절단

내과의사 박광혁은 미술하는 의사다. (c)창업일보.

(창업일보)박은영 기자 = 내과의사 박광혁(47)은 청진기를 대고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 의사일 뿐 아니라 캔버스 속 인물의 생로병사를 진찰하는 명화 해설자이기도 하다.

의학은 인체 구조와 기능을 조사하여 인간에게 일어나는 각종 질병과 상해를 막고 치료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인류 최고의 학문이다.

특히 수학과 과학이 인체 밖에서 일어나는 피상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의학은 다분히 체험과 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인간 본질을 더욱 소상히 밝히는 학문임에 성스럽다.

그것이 그림과 만나면 예술이 된다. 인체 구조를 도식화하여 의·과학적 체계를 명료하게 조명하고, 인체의 순환과 흐름을 눈앞에 보여주는 해부학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를 통해 의·과학적 사유를 예술의 세계로 확장시켜 놓았다.

내과의사 박광혁도 의술에 예술을 가미했다. 그는 세계 명화를 통해 인간 삶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설명한다.

그의 직업은 개인내과 및 검진센터를 운영하는 소화기내과 전문의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부터 꾸준히 진료실과 미술관을 오가며 ‘의학이라는 이성’과 ‘미술이라는 감성’을 잇는 예술계 융복합 문화사절단으로서 ‘명화 속 의학이야기’를 들려주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술사 강연을 마친 내과의사 박광혁 원장을 성동구 무학로12길에서 만났다. 소박한 저녁식사와 더불어 노트북 속 명화이야기를 정리하는 그는, 청진기를 대고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 의사일 뿐 아니라 캔버스 속 인물의 생로병사를 진찰하는 명화 해설자로 자리를 함께했다.

그가 이성과 감성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은 25년 전 대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여름 프랑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파리 루브르박물관과 오랑주리박물관, 퐁피두센터와 오르세미술관 등지에서 명화를 관람하다가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던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77)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대하며 일생일대에 다시없을 매우 큰 감명을 받게 된다.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발발한 ‘7월 혁명’을 묘사한 이 작품은 출판과 언론의 자유 제한, 의회 해산, 선거권 제한을 골자로 하는 ‘7월 칙령’ 선포에 프티 부르주아, 노동자, 학생 등 파리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와 맞서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교시절, 신촌 일대에서 직접 목격한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떠올리며 내면에 자리한 상처와 충격적 체험을 예술로 환원하게 된다. 당시 한국 대학가 현실을 반영한 듯 느껴지는 ‘명화의 상징성’이 가슴에 선연히 살아오며, 유신정권 적폐청산과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 극렬히 항거하던 당시의 데모 현장의 역사성이 역동적으로 가슴에 되살아났다.

“1987년 6월,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혼자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신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촌은 인도와 도로 가릴 것 없이 성난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전경들이 쉴 새 없이 쏘는 최루탄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숨쉬기도 어려웠습니다. 밀려오는 인파에 휩쓸리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시위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제 앞에서, 한 청년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현동 방면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신문을 통해 청년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한열. 제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청년의 이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며 신촌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과 피 흘리며 쓰러진 청년,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시위의 중심부까지 휩쓸려갔다가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치던 제 모습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안에 있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 후 그날을 떠올려도 더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한 점의 그림은 수만 갈래의 삶을 보듬고 위로합니다. 때로는 한 점의 그림에서 오랜 상처를 치유할 처방전을 얻기도 합니다. 이것이 의사인 제가 그림에 매료된 이유입니다.”

이후 의학도인 그는 학업을 병행하며 미술 분야에 대한 관심 역시 끈을 놓지 않은 채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데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몇 년 후 의대를 졸업한 그는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소화기내과 전임의를 역임하게 된다. 이어 네이버 지식인에서 소화기내과 자문의사로도 활동하면서 틈틈이 명화를 보기 위해 해외 미술관 순례 시간을 갖는다.

또한 대장내시경학회 총무이사와 임상초음파학회 사업이사는 물론 내과와 건강검진센터를 운영하는 가운데 의사와 일반인, 청소년, 기업 경영진 등을 대상으로 ‘의학과 미술’, ‘신화와 미술’을 주제로 강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렇게 그는 초심을 잃지 않고 각종 학회를 비롯해 교양 미술 강좌 등에서 서양미술사와 그리스·로마 신화 강의를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더욱 ‘월간 전시가이드’에 매달 미술 칼럼을 기고하는 한편 지난 2016년 9월부터 ‘모나리자 스마일‘ 서양미술사 모임에서 매주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의학적 식견으로 명화 속 인물 진단하다?

개인내과 및 검진센터를 운영하는 박광혁 내과의사가 들려주는 명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특히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일수록 관심도가 매우 높다. 고야의 <디프테리아>는 질병에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브뢰헬의 <맹인을 이끄는 맹인>은 엑스레이와 CT 스캐너 같은 의료 장비보다 그 병세를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나폴레옹의 질병과 사인(死因)은 현재까지 음모론이 끊이지 않아 흥미를 더한다. 그는 “나폴레옹의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이지만, 역사학자들은 누군가 나폴레옹의 재기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독이 든 음식이나 와인을 먹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한다”고 상반된 주장이 많다는 것을 귀띔한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을 그린 <튈르리궁전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퐁텐블로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임종을 맞는 나폴레옹> 3점의 명화를 통해 사인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 수 있다고 소개한다.

먼저, 다비드의 <튈르리궁전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의 경우 근엄한 표정의 나폴레옹이 조끼 단추를 몇 개 푼 다음 오른손을 조끼에 집어넣는, 다소 특이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일명 ‘나폴레옹 포즈’라고 불리는 이 자세는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도 빈번히 등장한다. 나폴레옹 포즈는 위장병의 증거다. 위산이 역류해 가슴이 타는 듯한 증상을 느끼는 역류성 식도염, 위염과 위궤양, 위암 같은 위장병은 명치 부위에 간헐적으로 통증을 일으킨다. 더욱 나폴레옹 포즈는 불편한 부위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는 것이 습관화된 결과다. 나폴레옹의 비서가 남긴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1802년부터 나폴레옹은 때때로 명치(가슴뼈 아래 중앙에 오목하게 들어간 곳) 부위에 심한 통증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책상에 기대거나 의자에 팔꿈치를 대고 조끼의 단추를 푼 다음 오른손을 넣어 아픈 곳을 문질러 통증을 완화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유배되기 몇 달 전을 묘사한 들라로슈의 <퐁텐블로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전의 나폴레옹이 배를 불룩 내밀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위암은 체중 감소, 식욕 부진, 지방 조직 및 근육 쇠퇴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르네의 <임종을 맞는 나폴레옹>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그림 이후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지 6년 후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3점의 명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폴레옹을 다시 부각시키며 그의 생로병사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역사와 명화, 인물과 생애가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새로운 해석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의학과 예술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

“한 장의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이에게 그림은 당시의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사료 역할을 하고, 어떤 이에게는 화학적 분석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인 제게 있어 그림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적 완전성, 즉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기록’으로 보입니다.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보면 그림에 대한 해석이 새롭게 열립니다.”

그가 보여주는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커피포트>라는 정물화는 주둥이가 짧은 커피포트를 거친 붓 터치로 묘사한 그림이다. 의학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로트레크의 자화상이다. 유전병으로 성장을 멈춘 짧은 다리와 그에 걸맞지 않게 큰 머리와 통통한 몸, 로트레크는 커피포트의 모습을 빌려 캔버스에 자신의 몸을 그렸다.

또한 영국 국왕 제임스 1세(JamesI, 1566~1625)의 부인 앤(Anne of Denmark, 1574~1619) 왕비를 그린 작자 미상의 초상화는 의학적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앤 왕비는 화려한 장식의 검은 상복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통통한 체형이다. 두 볼은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고 있고, 눈썹 바깥쪽 3분의 1이 매우 희미하다. 의학적 소견을 밝히자면, 전형적인 갑상샘기능저하증 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안드레이 쉬시킨(Andrey Shishkin) <시골의사(Village doctor)>는 명화 속 인물을 진단하는 박광혁 원장의 어릴 적 개인사와 연관돼 있다. 시골의사 또는 왕진의사의 기억 때문이다.

“어릴 적 살았던 서울시 성북동에는 태극당이라는 빵집 옆에 작은 의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어머니는 제가 어디 아픈 곳이 생기면 누나에게 저를 데리고 이곳에 가서 진료를 받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과거 종합병원 소아과장으로 근무하셨다는 할아버지 원장님은 대기 의자 몇 개만 달랑 있는 2층 소아과에서 많은 어린이를 진찰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매우 아파 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곳 원장님이 친절하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제 용태를 소상히 묻고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지금 이렇게 의사가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을 만나도 이렇게 감사한 기억이 있으면 사람은 보다 나은 존재로 발전하게 되는 가 봅니다.”

박광혁 원장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입원했던 환자가 건강해져 환하게 웃으며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끼고, 속절없이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한다고 토로한다. 하루 백 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병원의 재무 상황을 고민하다 보면 초심을 잃기도 하지만, 이럴 때 질병의 고통을 그린 명화를 대하면 다시금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사가 될 것을 다짐하게 된다는 그다. 의학적 지식과 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아는 의사가 되고자 노력하는 그는, 오늘도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명화 속 인물과 마주할 때 의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에 각오를 새롭게 한다.

현재 그는 그동안 쌓아온 의료 지식과 경험, 그리고 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모아 <미술관에 간 의학자>(어바웃어북)를 출판했다. 의학의 주요 분기점들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명화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통해 의학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매주 수업하고 있는 서양미술사 스터디 모임인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강의한 내용을 일반 대중과 함께 나누자는 취지에서다. <퍼펙트내과(1-7권)>(2005 군자출판사)과 <소화기 내시경 검사테크닉>(2006 메디안북), <Solution 내과>(2009 메디안북) 등을 저술한 경험을 토대로 그의 의학적, 예술적 식견과 열정이 함께 녹아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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